놀랍게 편하게 잤다.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는데 놀랄뿐이다. 몇년 전엔가 고가의 호텔 기차를 타고 여행하였을 때, 가려지지 않고 전해지는 철길소음에 밤새 고생한 것과 너무 달랐다. 크루즈 여행의 큰 장점 중에 하나는 자는 동안 다음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편히.
아내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새벽. 나는 버리지 못하는 습관때문에 새벽 도둑고양이처럼 카메라를 챙겨 들고 방을 빠져나왔다. 사진은 이 시간이 하루 어느 때보다 중요하니까...
14층에 있는 천연 잔디밭에 도착하니 아직 사방이 고요한데 선원 한사람이 잔디를 깍고 있었다. 잔디밭에는 물주는 스프링클러를 틀어 놓았다. 배 위에서 잔디를 깍다니... 신기한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바다 멀리 등대 불빛이 붉다.
부페 oceanview cafe 식당은 24시간 운영하므로 편리할 때가 많다. 난 아메리카노 한잔을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뽑아 수영장 옆 비치의자에 앉아 마시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약간 습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을 즐기는 동안 사방이 조금씩 밝아진다. 그리고 일찍도 나온 sail boat 한 척이 검붉은 하늘 아래 순항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 밤새 항해했을것 같다. 문득 그 배에 타고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도 sail boat 타고 다니고 싶은데... 몇년 전부터 저렇게 살고 싶어 교육도 받고, 동호회도 쫒아 다녔는데 위험하다며 집에서 반대를 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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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조각 잎새같은 세일보트의 모습을 보는 동안 날이 제법 밝았고 등대가 뚜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건 등대가 아니라 화산이 폭발하여 불길이 솟는 장면이었다.
시실리 북쪽에 있는 스트롬볼리 섬. 그 정상 부근엔 작지만 붉은 화염과 연기가 분출하고 있었다.
제우스가 거인족과의 싸움을 벌이면서 튀폰을 시실리의 애트나 산으로 눌러 놓았고, 그 괴물이 용트림 하는 것이 애트나 화산 폭발이란 그리스 신화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스트롬볼리 섬은 튀폰의 꼬리 쯤 되는 부분을 눌러놓았나 보다.
망원렌즈로 최대한 당겨 분화구를 찍는다. 거친 튀폰의 숨결이 들리는 듯 하다. 그런데 잠시 후 빛이 조금 더 밝아 지더니 마치 흡연자들이 담배연기로 도넛을 만드는 것같은 짙은 회색연기가 분화구에서 피어 올랐다.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화산 폭발의 연기가 퍼져 형태가 희미해질 즈음 바다 위를 보니 세일보트가 두 척이나 떠있다. 부러움과 함께 정말 위험하지는 않나 걱정이 되었다. 제법 큰 폭발이 일어난다면 화산석이 날아올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섬의 한쪽 해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집들이었다.
시실리가 마피아의 발상지라더니 이곳 사람들은 바로 옆에서 활화산이 등대처럼 밤새 불꽃을 뿜고 있는데 잠이 오는 모양이다. 머리 위에 폭탄같은 북한을 두고 천하태평으로 잊고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한건가 생각이 든다. 인간은 남 눈의 티끌은 잘 봐도 내 눈안의 기둥은 못본다고 했던가?
스트롬볼리 섬을 지나치는 크루즈. 화산 밑 마을 사람들의 안전을 빌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태리 반도와 시실리를 갈라놓은 메시나 해협으로 배가 접근한다. 멀리 메시나 항구가 아침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항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구를 잘 아는 도선사에게 조종을 넘겨 주어야 한다. 도선사를 태운 꼬마 모터 보트가 메시나 항구에서 우리 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시실리. 4천년 쯤 전에 카르타고 인들이 도시를 세운 후로 고대 그리스 인들이 진출해 그리스문명이 찬란하게 꽃피었던 곳이다. 로마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카르타고와 포에니 전쟁을 벌였을 때도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고 그후에는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이 충돌하는 곳이었다. 또 수백년 동안 해적들의 피해를 입다가, 해적의 본거지로 바뀌어 악명을 떨치기도 했던 참 편할 날 없는 역사를 가진 곳이다.
이슬람과 지중해 지배권을 놓고 벌인 레판토 해전에 참가한 기독교 배들이 집결했다 출항한 메시나 항구의 현대적 모습.
도선사는 묘기처럼 전진, 후진, 회전을 자유자재로 하며 좁은 공간에 산만한 배를 정박시킨다. 부두에는 이 배에서 내릴 관광객을 실어 나를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있다.
선실 발코니에서 도선사의 조종술에 감탄하고 있는데 메시나 시내 뒷편으로 거대한 연기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활화산인 애트나 화산이 살아있다. 괴물 튀폰의 축하 공연인가?
우리가 저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섬에 상륙하다니... 한 순간 망설여졌지만 한반도 출신답게 용감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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