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아 문명.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에 들지는 못하지만 그리스에 처음으로 꽃 핀 문명이다. 지리적 위치 덕에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모두에게서 영향을 받아 찬란하게 발전했었다.
아침 일찍 이라클리온 산책을 마치고 난 북쪽의 크노소스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호텔에서 공항 쪽으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버스터미널에서 탔다. 터미널을 나오고 얼마 안되어 언덕길을 오르더니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구릉지대를 달려간다.
크노소스라고 내린 곳엔 기념품 가게를 겸하고 있는 작은 상점과 식당이 몇 개 있을 뿐 한가하다. 점원에게 물어 매표소 방향으로 가 유적에 입장하였다.
50미터나 걸었을까? 초 여름의 그리스 태양이 모든 것을 녹일듯 작열하는데, 커다란 느티나무 뒷편으로 꿈 속인듯 무너지다 만 건물터가 보인다.
이곳이 미노스 왕이 다스리던 곳이며, 소의 머리를 가진 사람 미노타우로스가 지하 미로에서 어슬렁거리던 곳이란 말인가? 신화 속에 등장하는 곳이 실존하는 곳이란게 믿기어렵다. 신화의 어떤 부분은 사실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역사와 신화는 한 4천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구분이 모호해진다.
서울 경복궁 터 넓이 정도 쯤일거라 짐작되는 면적에 옛 궁성의 토대들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군데군데 키 큰 소나무들이 풍류객처럼 너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햇살로 부터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사람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모여 있는 곳 너머로 크레타의 험준한 산악지형이 펼쳐진다. 화산 활동이 심한 섬이라 땅이 비옥하다고는 하지만 평야가 흔치 않다.
2층으로 된 건물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유적터에 붉은 칠을 한 원기둥이 크레타 문명의 상징 같은 것이다. 크노소스 궁전은 가장 높은 곳은 6층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저 검은 지하실이 미노타우로스가 갇혀있던 곳인지 모른다. 크노소스가 기원전 1500년 경에 무너졌다고 하니 지금부터 3500년도 더 전에 6층 건물을 지었다는 뜻이다.
건물 잔해에 복잡한 연결 통로들이 보인다. 그리스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인 다에달로스가 설계하고 시공했다는 미로가 바로 이것이다. 그 미로는 너무 복잡해 설계자인 다에달로스도 완성된 미로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날개를 만들어 달고 날아서 나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의 아들 이카루스는 끝없이 고도를 높이다가 태양열에 의해 날개를 붙였던 밀납이 녹아 추락사하고 말았다.
무시무시하게 견고한 벽 사이로 난 통로. 이런 곳에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가 쫒고 쫒기는 혈투를 벌였을 것이다. 미노스 왕의 왕비인 파시파에의 추잡한 성욕의 결과로 태어난 비극적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테세우스는 미로를 들어올 때 미로를 빠져나온다. 미노스 왕의 딸인 아리아드네 공주가 준 실타래를 풀고 들어간 덕에 살아나온 테세우스는 공주를 데리고 섬을 탈출한다. 그러나 아테네에 도착하기 전, 테세우스는 섬에 공주를 버리고 도망갔다. 그 죄에 대한 신들의 벌일까? 테세우스의 아버지 아이게우스왕이 돌아오는 배에 검은 깃발이 내걸린걸 보고 아들이 죽은 줄 알고 자살한다. 믿기 어려울 만큼 막장인 신화 속의 비극이다.
건물이 지어진 것을 좀 자세히 보다 이게 과연 4천년 전 기술인가 의심이 간다. 돌로 쌓는 것은 일반적이었지만 돌을 쌓다가 콘크리트를 친 부분이 뚜렷이 보인다. 크레타 박물관에서 도자기 기술에 넋이 나갔을 때 만큼 놀랐다.
정신없이 유적을 돌아다니다보니 제법 지쳐 소나무 그늘에서 한 숨 돌렸다. 너무 뜨거운 햇살때문에 새도 한마리 날지 않는 오후 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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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의 벽화는 지금도 예술성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어떤 사학자는 크레타 회화에 나타난 미노아 문명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19세기 파리 살롱에 앉아있는 여인들 처럼 우아하다고 했다. 프레스코 기법으로 순식간에 그려진 그림이 저 정도이다.
그림이 걸려 있는 건물의 잔해에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라도 이걸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 옆으로 크레타의 도자기 병들이 보인다. 어른 가슴까지 오는 도자기가 흔한 걸로 보아 이곳의 물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성으로 들어오는 입구일거라 생각되는 곳에 그려진 벽화. 세계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생선을 들고가는 사람 그림이다. 머리 장식과 옷이 정말 화려하고 몸매는 우아하다. 건물 밖은 계단이고 대지는 발아래 펼쳐진다. 넓은 올리브 나무 농장을 지나 멀리 제우스가 자란 이다 산이 보인다. 이곳은 신화가 보는 곳마다 숨을 내뿜는다.
성벽아래 소나무 그늘에서 쉬다 낮달이 눈에 들어 온다. 그리고 잠시 뒤 놀랍게도 성벽 위에 새 한마리가 와서 앉았다. 느닷없이 난 저것이 태양을 향해 날다 추락사한 이카루스가 환생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곳에선 신화와 현실이 한데 엉킨다.
이곳에 오기 전 경주에 간 것이 시간을 제일 많이 거슬러 올라 간 경험이었다. 첨성대, 안압지, 황룡사지, 불국사, 설굴암 등을 보면서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후 유럽 여러 나라를 다녀 보았지만 신라를 뛰어 넘는 것은 잘 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에 와 4천년 전의 유적을 마구 만지고, 밟고 다녀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2천년도 안된 신라의 유적은 만져보지도 못했는데... 이곳에 온 것은 나를 그리스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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